“인재로 시작해서 관재로 끝났다.”
최근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두고 사회 각계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표현했 다.
선체 구조의 무리한 증축과 여객 적재한도 및 승객 정원이 늘어나면서 대형 참 사는 시작됐고, 사고 이후 늑장대응으로 탈출 인원을 제외한 구조자는 ‘0명’이었던 탓이다.
세월호의 탑승자 숫자는 4일 만에 6차례 번복됐을 뿐 아니라, 선체가 가라앉은 지 30분 뒤 고작 20명의 잠수부가 투입되고 잠수 준비시간 단축을 위한 바지선도 다음날에야 설치됐다.
선박 안전·감독을 담당해야 할 한국선급과 해양수산부 공무원 간의 유착도 드러 났다. 공무원을 향한 국민들의 신뢰가 침몰하는 순간이었다.
화살은 결국 공무원 채용제도로 쏠렸다. 지난 19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 화를 통해 고위직 공무원의 등용문이었던 5급 공채 비율과 민간 경력자 채용 비율 을 5대5 수준으로 맞춰가겠다는 뜻을 나타냈다.
이 때문에 기존 공무원 수험생들 사이에선 행시를 준비하던 인원이 7급 공채로 유입될 가능성까지 제기되며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.
잘못을 저지른 공무원들은 따로 있는데, 개혁의 대상은 채용시험이 돼버리니 나 름대로의 전문성과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온 수험생들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 두깨를 맞은 격이다.
그러나 ‘개혁’을 외치는 이들은 지금의 채용방식으로는 변화하는 현대사회의 행 정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얘기한다.
공무원 채용시험, 과연 이대로는 안 되는 것일까.
▲ 공무원 채용, 툭하면 언급되는 이유
공무원 채용제도 개선이 자주 언급되는 배경엔 현 채용제도의 근간인 ‘계급제’ 가 있다.
계급제는 사람을 중심으로 학력과 경력, 능력 등의 요소를 기준으로 계급을 분 류하는 제도로 관료제의 전통이 강하거나 농업사회적 전통이 강한 국가에서 이를 채택하고 있다. 우리나라와 독일, 프랑스, 일본 등이 계급제를 실시하는 대표적인 국 가다.
국민 모두에게 공직수행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고 순수하게 시험성적에 의거 해 인재를 선발하는 장점 덕분에 그간 계급제는 정권의 교체에 상관없이 행정의 일 관성과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기제로 작용해왔다.
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행정고시와 7·9급 공무원을 시험을 통해 인재를 일괄 선발해서 관리하는 현 ‘계급제’로는 현대 정부의 인적자원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다 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.
행정수요가 정형화돼 있던 과거의 경우 안전성과 예측가능성이 있어 일정 수준 의 능력과 경험만으로 충분히 공무 수행이 가능했지만 행정환경의 불확실성이 증 대되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지식기반 사회에선 표준적인 능력만을 소유한 공무원으 론 부족하단 얘기다.
최근 세월호 사건을 통해 부각된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주의·복지부동 또한 이 같 은 채용제도의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.
필기시험 위주의 공개채용 방식에도 비판이 제기된다. 지나치게 많은 인력이 암 기 위주의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, 공
무원으로서의 자질을 평가하는데 관련성이 떨어지는 과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.
다양한 직업 세계에 진출해 경력을 쌓고 숙련도를 높여야 할 청년인력의 상당수 가 국어, 영어 등 직무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과목에 시간을 투자하는 현 제도로는 공무원으로서 필요한 실무능력을 키울 수 없을뿐더러 국가경쟁력 낭비란 지적도 나 온다.
결국 현 공무원 채용제도를 둘러싼 논란은 60년이 넘는 공직사회의 전통을 이어 갈 것인지, 공직사회의 새판 짜기에 돌입할 것인지의 갈등인 셈이다.
▲ 정부는 ‘직위분류제’ 확대 시동 중
현 ‘계급제’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‘직위분 류제’의 확대다.
필요한 인재를 한꺼번에 뽑아 필요한 부처에 배치하는 계급제와 달리, 직위분류 제는 일의 종류와 난이도·책임도에 따라 공직을 분류하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채 용해 전문성을 키우는 방식이다.
직위분류제를 채택하는 대표적인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은 우리나라와 같은 ‘고시’ 가 없다.
각 기관별로 분권화가 이뤄져 있어 중앙에서 일률적으로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부처에 공석이 생길 경우 공개경쟁을 통해 충원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 다.
채용절차는 미국 공무원 공개 채용 사이트인 USA JOBS에 공고가 올라오면 지 원자가 학력, 성적, 경력 등을 기재하는 상세 이력서와 질문사항에 대한 답변 등을 작성해 제출한 뒤 직무를 위한 인터뷰가 실시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.
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한 분야에 특화된 인재를 선발해 계속 해당 분야에서 전 문성을 높여가는 미국식 공무원 채용방식을 우리도 부분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 다고 조언한다.
공직사회에 ‘인턴십’을 도입하는 방안도 거론된다. 지금의 공개경쟁 채용시험제 도가 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 시험을 통해 측정이 어려운 리더십과 협동성, 직 무적합성, 문제해결능력 등 다양한 요소에 대한 평가를 위해 인턴과정을 거친 뒤 공 무원으로 선발하는 방식이다.
직위분류제가 공직사회의 무조건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경계론도 있다. 미국 식 직위분류제의 경우 공무원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데 많은 비용이 발생할 뿐 아 니라 개인주의를 조장해 공직사회의 공직관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기 때 문이다.
‘낙하산 인사’가 여전한 한국 사회의 고질병이 직위분류제 하에 더욱 만연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직위분류제에 대한 반발을 높이는 요소다.
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 딸의 부정 특채사건처럼 언제든 채용과정의 공정성과 특 혜시비가 일 수 있는 것이 직위분류제의 취약점인 탓이다.
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정부는 이미 직위분류제의 활성화 수순에 나섰 다.
기존의 계급제에 민간 경력자 채용이나 개방형 직위 등 직위분류제 요소를 가미 해온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통상·재난안전 분야 공무원을 대상으로 직위분류제 를 도입키로 결정한 것이 그것이다.
공직사회에 또 한 번의 변화의 바람이 일게 되는 셈이다.
지난 3주간의 기획연재에서 다뤄졌듯, 공무원 채용제도는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지금도 변화를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것이다.
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‘시험’이라는 획일적인 방식을 넘어 전문성 있는 인재 를 등용키 위한 ‘채용’으로 진행돼왔다.
변화를 읽고 변화에 민첩하게 적응할 수 있는 인재야말로 공직사회의 내일을 이
끄는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유다.